얼마 전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건설자재를 공급하는 한 중견기업의 대표가 수년간 유지해온 경쟁사와의 가격 합의 관행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인지했습니다. 내부 법무팀의 조사 결과 명백한 부당 공동행위, 이른바 담합에 해당한다는 결론이 나왔고, 대표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자진신고를 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때 활용할 수 있는 제도가 바로 리니언시(Leniency), 즉 담합 자진신고 감면제도입니다.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하 공정거래법) 제44조에 근거한 이 제도는, 담합 사실을 자진신고하거나 조사에 적극 협조한 사업자에게 과징금과 시정조치를 감경 또는 면제해 주는 장치입니다.
다만, 신고 시점과 방법, 준비 서류에 따라 결과가 극명하게 갈리기 때문에 신청 전 반드시 아래 8가지 항목을 점검해야 합니다.
리니언시의 핵심은 순위 싸움입니다. 공정거래법 시행령에 따르면 1순위 신고자는 과징금 전액 면제, 2순위 신고자는 50% 감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3순위 이하부터는 감면 혜택이 사실상 없습니다. 경쟁사가 먼저 신고하면 그 순간 1순위 기회는 사라지므로, 내부 검토가 끝났다면 시간이 곧 전략입니다.
단순히 "합의가 있었다"는 진술만으로는 감면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공정위는 조사 개시 또는 심의 진행에 필요한 증거(이메일, 회의록, 메신저 대화, 가격 결정 내부문서 등)를 제출할 것을 요구합니다. 증거의 질과 양이 감면 인정 여부를 좌우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공정거래법 제44조 제1항 단서에 따르면, 다른 사업자에게 부당한 공동행위를 하도록 강요하거나 이를 주도한 자는 자진신고 감면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실무에서는 회합 소집 빈도, 가격 제안 주체, 합의 이탈 시 제재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합니다. 주도적 역할이 의심되는 경우라면 사전에 법적 평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감면을 받으려면 자진신고 시점까지 해당 부당 공동행위를 중단한 상태여야 합니다. 신고 후에도 합의된 가격을 그대로 적용하거나 경쟁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면, 공정위가 성실한 협조 의무 위반으로 감면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리니언시는 신고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공정위 조사 과정 전반에 걸쳐 추가 자료 제출, 임직원 진술 협조, 사실 확인 등에 성실히 응해야 합니다. 도중에 자료 은닉이나 허위 진술이 적발되면 감면 지위가 박탈됩니다. 조사 기간은 사안에 따라 6개월에서 2년 이상 소요될 수 있으므로 장기적 협조 체제를 갖추어야 합니다.
담합은 행정 제재(과징금)뿐 아니라 형사처벌(3년 이하 징역 또는 2억 원 이하 벌금) 대상이기도 합니다. 공정위 자진신고 감면은 과징금에 대한 것이며, 검찰의 형사 기소 여부는 별개입니다. 다만 실무적으로 1순위 자진신고자에 대해서는 공정위가 검찰에 고발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형사 면책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2순위의 경우에도 고발 면제가 가능하나, 반드시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자진신고로 과징금을 감면받더라도, 담합으로 피해를 입은 거래상대방이나 소비자의 민사 손해배상 청구권까지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정위의 처분 확정은 후속 민사소송에서 피해자 측에 유리한 증거로 활용될 수 있습니다. 공정거래법 제56조의2에 따라 1순위 자진신고자는 손해배상액이 감경될 수 있으나, 완전 면책은 아닌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합니다.
리니언시 절차는 공정거래법, 시행령, 공정위 고시 및 심사지침이 복합적으로 적용되며, 신고서 작성 방식과 증거 정리 수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실무에서는 자진신고 경험이 있는 공정거래 전문 변호사의 조력 하에 마커 신청(순위 확보를 위한 잠정 신고)부터 최종 감면 결정까지의 전 과정을 관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실무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마커(Marker) 제도입니다. 아직 증거 수집이 완료되지 않았더라도, 공정위에 먼저 자진신고 의사를 표시하고 일정 기간(통상 15일 내외) 내에 보충 자료를 제출하는 방식으로 순위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마커 신청 시 유의사항
마커를 신청하더라도 공정위가 부여한 기한 내에 충분한 증거를 보충하지 못하면 마커 지위가 소멸합니다. 따라서 마커 신청과 동시에 내부 증거 수집을 병행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공정거래법 제44조 및 같은 법 시행령 제51조에 따른 감면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1순위 자진신고자 : 과징금 전액 면제, 시정명령 감경 또는 면제
2순위 자진신고자 : 과징금 50% 감경, 시정명령 감경 가능
조사 협조자 : 공정위 직권 조사 개시 후 협조 시, 기여도에 따라 감경 가능(최대 30%)
다만 위 비율은 사안의 구체적 사정, 증거 기여도, 협조 성실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공정위의 최종 판단에 의해 확정됩니다.
많은 기업이 간과하는 점이 있습니다. 담합 관련 내부 조사(Internal Investigation)를 진행하면서 증거를 정리하는 과정 자체가 법적 리스크를 수반한다는 것입니다. 내부 문서 정리 과정에서 증거가 훼손되거나 변경되면 증거인멸로 간주될 수 있고, 이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또한 자진신고 사실이 경쟁사에 알려질 경우, 해당 시장에서의 거래 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무적으로 공정위는 신고자의 신원을 조사 완료 전까지 비공개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며, 이 점은 자진신고를 결심하는 데 있어 중요한 고려 요소입니다.
리니언시 제도는 담합의 적발 가능성이 높아진 현재의 공정거래 환경에서, 기업이 선제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법적 수단입니다. 위 8가지 항목을 체계적으로 점검한 뒤, 신속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