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제 계약서를 영어와 한국어 두 가지 언어로 작성하면서, 양 언어본 사이에 해석이 달라지는 상황은 실무에서 놀라울 정도로 빈번합니다. 글로벌 무역, 합작투자, 기술이전 계약 등 다양한 영역에서 언어 상충 문제가 분쟁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2023년 대한상사중재원 접수 사건 중 국제중재 비율은 전년 대비 약 18% 증가했고, 그중 상당수가 계약서 해석 분쟁, 특히 언어본 간 불일치 문제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국제 계약의 언어 상충 해석 문제를 실무 관점에서 직설적으로 정리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언어 상충의 근본 원인은 번역의 한계입니다. 법률 용어는 각 법체계에 고유한 개념을 담고 있어, 1대1 대응 번역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indemnify and hold harmless"라는 영미법 특유의 면책조항은 한국 민법의 손해배상 개념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를 단순히 "면책한다"로 번역하면, 면책의 범위(직접손해만인지, 간접손해까지인지)에서 해석이 갈라집니다.
또한 계약서를 영어로 먼저 작성한 뒤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법률 전문가가 아닌 경우 의미가 축소되거나 확장되는 일이 흔합니다. 반대 방향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간극이 수억 원 규모의 분쟁으로 번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무에서 사용하는 언어 우선 조항(Prevailing Language Clause)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뉩니다.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습니다. 언어 우선 조항이 아예 없는 계약서가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분쟁이 발생하면 준거법(Governing Law)에 따른 계약 해석 원칙에 의존해야 하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워집니다.
언어 우선 조항이 없거나 불명확할 때, 준거법이 무엇이냐에 따라 해석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한국법이 준거법인 경우, 우리 민법 제106조(사실인 관습)와 제105조(임의규정) 등에 따라 당사자의 진정한 의사를 탐구합니다. 법원은 계약서 문언뿐 아니라 교섭 경위, 관행, 계약 목적을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즉 특정 언어본이 자동으로 우선하지 않고, 사안별로 어떤 언어본이 당사자의 진의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합니다.
영미법(영국법, 뉴욕주법 등)이 준거법인 경우, 계약서 문언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Parol Evidence Rule). 따라서 언어 우선 조항이 명시되어 있다면 그 문언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핵심 포인트: 준거법과 언어 우선 조항은 반드시 함께 설계해야 합니다. 준거법을 한국법으로 하면서 영어본 우선 조항을 두거나, 반대로 영미법을 준거법으로 하면서 한국어본 우선을 두는 경우, 해석의 불확실성이 오히려 커질 수 있습니다.
ICC(국제상업회의소), SIAC(싱가포르국제중재센터), KCAB(대한상사중재원) 등 주요 중재기관에서 언어 상충 문제를 다루는 실무 경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언어 우선 조항이 명확하면 중재판정부는 이를 존중합니다. 별도의 사정이 없는 한 우선 언어본에 따라 해석합니다.
둘째, 동등 효력형이거나 우선 조항이 없으면, 중재판정부는 원문(Original Language)이 어느 것인지를 중시합니다. 계약서가 영어로 먼저 작성되고 한국어로 번역되었다면, 영어본의 비중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셋째, 교섭 과정의 이메일, 회의록, 초안 수정 이력 등 외부 증거가 판단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실무에서 이 증거들의 보존 여부가 승패를 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제 계약을 체결하거나 검토하는 실무자라면, 아래 네 가지를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국제 계약의 언어 상충 문제는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 95% 이상 예방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기업이 계약 체결을 서두르면서 양 언어본의 정밀한 대조 검토를 생략한다는 점입니다. 계약 금액이 클수록, 이행 기간이 길수록, 언어 조항에 대한 법적 검토는 비용이 아니라 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