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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부모님을 여의고 나면,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유언장 내용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유언으로 재산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기쁘기보다 부담이 앞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빚이 딸린 부동산이 유증(유언에 의한 증여)으로 지정되어 있거나, 형제자매 사이의 감정적 갈등 때문에 유증받은 재산을 받고 싶지 않은 상황도 실무에서 자주 접하게 됩니다.
오늘은 유증을 포기하는 방법과 그 법적 효과를 한 가족의 사례를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례 개요
서울에서 소규모 인쇄업체를 운영하던 아버지 C씨(향년 72세)가 지난해 세상을 떠나며 자필증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유언장에는 큰아들 D씨(45세, 회사원)에게 경기도 파주 소재 공장 건물과 토지를, 둘째 딸 E씨(42세,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서울 마포구 소재 오피스텔 1채를, 막내아들 F씨(38세, 자영업)에게 예금 8,000만 원을 각각 유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문제는 공장 건물에 근저당이 설정되어 있었고, 잔존 채무가 약 2억 5,000만 원에 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큰아들 D씨는 이미 본인 명의 주택담보대출도 있는 상황이어서, 유증을 받으면 오히려 경제적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냥 안 받겠다고 말하면 되지 않나요?"라고 생각하시는데, 유증 포기에는 법적으로 정해진 절차가 있습니다.
유증 포기의 핵심 원칙
민법 제1074조에 따르면, 수유자(유증을 받는 사람)는 유언자가 사망한 후 언제든지 유증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포기의 효력은 유언자 사망 시점으로 소급합니다.
유증의 종류에 따라 포기 방법이 달라지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포괄적 유증 포기
재산 전체 또는 일정 비율을 유증받은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상속포기 절차에 준하여 가정법원에 포기 신고를 해야 합니다(민법 제1078조).
기한은 유증 사실을 안 날로부터 3개월 이내입니다.
특정적 유증 포기
특정 재산(부동산, 예금 등)을 지정하여 유증받은 경우입니다.
별도의 법원 절차 없이, 유증의무자(상속인)에게 포기 의사를 표시하면 됩니다.
기한 제한은 원칙적으로 없으나, 유증의무자의 최고(독촉)가 있으면 상당한 기간 내에 답해야 합니다.
D씨의 사례에서 공장 건물과 토지는 특정적 유증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D씨는 다른 상속인인 E씨, F씨에게 "공장에 대한 유증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하면 됩니다. 다만 실무에서는 향후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내용증명 또는 공증된 서면을 통해 포기 의사를 밝히는 것을 강하게 권합니다.
유증이 포기되면 그 효력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취급됩니다(민법 제1074조 제2항). 이 부분에서 혼란을 느끼시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유증 포기 재산의 귀속 원칙
유증이 포기되면, 해당 재산은 유언에 별도의 보충적 규정이 없는 한 상속재산으로 복귀합니다. 복귀된 재산은 법정상속분에 따라 공동상속인들이 나누어 갖게 됩니다.
D씨가 공장 유증을 포기한 경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D씨가 포기한 공장 건물과 토지는 상속재산으로 돌아갑니다.
2 E씨의 오피스텔 유증과 F씨의 예금 유증은 별도이므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3 공장 부분에 한해서, D씨, E씨, F씨가 법정상속분(각 1/3)에 따라 공동상속인 지위로 분할 대상이 됩니다.
4 근저당 채무 2억 5,000만 원 역시 상속채무로서 법정상속분에 따라 분담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D씨가 유증은 포기했지만 상속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므로, 공장이 상속재산으로 돌아오면 D씨도 그 재산에 대한 상속분을 갖게 됩니다. 만약 공장 자체를 전혀 받고 싶지 않다면, 상속재산분할 협의에서 이를 조율하거나, 상속포기를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사례에서 E씨는 오피스텔(시가 약 3억 8,000만 원)을 유증받았는데, 만약 D씨가 유증을 포기한 후 상속분이 자신의 유류분(법정상속분의 1/2)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면 유류분 반환청구가 가능한지 궁금해하실 수 있습니다.
유증 포기자도 유류분 반환청구가 가능할까?
유증 포기는 자발적 행위이므로, 스스로 포기한 유증 부분에 대해서 유류분 부족을 주장하는 것은 법원에서 인정받기 어렵다는 것이 통설적 견해입니다. 자신의 의사로 재산을 거절해 놓고, 다른 상속인에게 유류분 반환을 청구하는 것은 신의칙(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유증 포기와 무관하게 원래 법정상속분으로 받을 수 있는 상속재산 자체가 유류분에 미달하는 경우에는 별개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상속재산 전체의 규모, 채무 관계, 각 상속인의 특별수익 유무 등을 종합적으로 따져야 합니다.
D씨의 경우 상속재산 전체(공장 시가 약 4억 원 - 채무 2억 5,000만 원 = 순가치 약 1억 5,000만 원, 오피스텔 3억 8,000만 원, 예금 8,000만 원)를 고려했을 때, 유증 포기 후에도 상속재산 분할을 통해 일정 몫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금액 산정은 생전 증여 내역이나 기여분까지 포함해서 계산해야 하므로, 단순히 숫자만으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유증 포기를 고민하고 계신다면, 아래 사항을 미리 확인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1 유증의 유형을 먼저 확인하세요. 포괄적 유증인지 특정적 유증인지에 따라 포기 절차가 달라집니다. 포괄적 유증이라면 법원에 3개월 이내에 신고해야 하므로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습니다.
2 포기 의사 표시는 반드시 서면으로 남기세요. 구두로만 전달하면 나중에 "포기한 적 없다", "동의한 적 없다" 같은 분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내용증명 우편이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3 유증 포기와 상속 포기는 다릅니다. 유증만 포기해도 상속인 지위는 유지되므로, 상속채무를 함께 떠안을 수 있습니다. 빚이 재산보다 많은 상황이라면 상속 한정승인이나 상속 포기까지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4 유류분 침해 여부를 사전에 계산해 보세요. 유증을 포기한 뒤 유류분 부족을 주장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포기 전에 전체 상속재산 가액과 본인의 유류분을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5 다른 상속인과의 관계도 고려하세요. 유증 포기 후 재산이 상속재산으로 복귀하면, 형제자매 간 분할 협의가 필요합니다. 감정적 대립이 예상된다면, 협의 단계부터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원만한 해결에 도움이 됩니다.
가족 간 상속 문제는 법적 판단과 감정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혼자 결정하시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유증을 받을지, 포기할지 결정하기 전에 상속재산 전체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