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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인테리어 공사를 맡긴 A씨(42세, 자영업)는 시공업체 B사와 5,800만 원 규모의 공사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착공 예정일이 열흘이나 지나도 B사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뒤늦게 "자재 수급이 어렵다"는 문자 한 통만 보내왔습니다. A씨는 B사가 계약 이행을 거절한 것으로 보고 계약을 해제한 뒤 위약금을 청구했지만, B사는 "이행을 거절한 적 없다, 단지 지연된 것뿐"이라며 맞섰습니다.
이처럼 상대방이 계약을 "안 하겠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상황, 실무에서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이행거절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단순 지체(지연)에 불과한지에 따라 법적 효과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그 판단 기준을 정확히 이해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민법에서 채무자가 약속한 급부(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상황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이행지체, 이행불능, 그리고 이행거절입니다.
이행지체 - 이행기가 도래했으나 아직 이행하지 않은 상태. 채무자가 이행 의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이행불능 - 물리적 또는 법률적으로 이행이 불가능해진 경우입니다.
이행거절 - 채무자가 정당한 이유 없이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종국적, 확정적"으로 표시한 경우입니다.
핵심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행지체의 경우 채권자(계약 상대방)는 원칙적으로 상당한 기간을 정하여 이행을 최고(독촉)해야 하고, 그 기간이 지나야 계약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민법 제544조). 반면 이행거절이 인정되면, 별도의 최고 절차 없이 곧바로 계약 해제가 가능합니다. 최고라는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점에서, 이행거절 여부의 판단은 실무적으로 매우 큰 의미를 갖습니다.
상대방이 "이 계약, 이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명시적으로 선언하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행동과 정황을 통해 그 의사를 추론해야 합니다. 법원이 이행거절 의사를 판단할 때 살펴보는 주요 기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앞서 소개한 A씨의 사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B사는 착공 예정일로부터 열흘간 무응답이었고, 뒤늦게 "자재 수급이 어렵다"는 문자 한 통만 보냈습니다. 이것만으로 이행거절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안만으로는 이행거절로 인정받기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재 수급이 어렵다"는 표현은 이행 의사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일시적 곤란을 알린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B사가 이후에도 구체적인 착공 일정을 제시하지 않고, 다른 현장에 인력을 투입하는 등의 사정이 추가로 확인된다면, 묵시적 이행거절로 판단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실무에서 이행거절이 자주 다투어지는 대표적인 유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행거절 여부의 판단은 단순한 이론적 구분이 아닙니다. 계약 해제 시점, 손해배상 범위, 위약금 청구 가능 여부에 직접 영향을 미칩니다.
최고 없는 즉시 해제 가능 - 이행거절이 인정되면 민법 제544조의 최고(독촉)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계약을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는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채권자에게 상당한 이점입니다.
이행기 전이라도 해제 가능 - 약속된 이행기가 도래하기 전이라도, 채무자가 이행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정적으로 표시하면 "이행기 전 이행거절"로 즉시 해제가 가능합니다.
전보배상 청구 - 이행거절이 확정되면 채권자는 이행에 갈음하는 전보배상(계약이 정상적으로 이행되었을 경우 얻었을 이익 상당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계약 상대방의 이행거절이 의심되는 상황에서, 향후 법적 분쟁에 대비하려면 몇 가지 핵심 사항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상대방의 행위가 이행거절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단순히 "연락이 없다" "지연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채무자의 언행, 계약 이행 준비 상황, 교섭 경위, 재정 상태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하며, 이 판단이 잘못되면 오히려 해제권을 행사한 측이 계약 위반의 책임을 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이행거절이 아닌 단순 지체 상황에서 최고 절차 없이 성급하게 계약을 해제하면, 그 해제 자체가 무효로 판단되어 해제 통보를 한 쪽이 위약금을 부담하는 역전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행거절 여부의 판단은 그만큼 신중하고 전문적인 검토가 요구되는 영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