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의료 과실 손해배상 소송에서 가장 큰 고비는 '감정'입니다. 의사의 과실이 있었는지, 그 과실과 환자의 피해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의학 전문가가 판단하는 절차인데, 이 감정 결과가 사실상 재판의 승패를 가릅니다. 문제는 절차가 복잡하고,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정리하겠습니다.
서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A씨(46세, 남성)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 후 왼쪽 다리에 심한 마비 증상이 나타났고, 6개월이 지나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병원에서 재진료를 받은 결과 "수술 과정에서 신경 손상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을 들었습니다. A씨는 수술을 집도한 B병원을 상대로 8,5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사건은 감정 절차에서 승부가 갈렸습니다. A씨 측이 감정 신청을 제대로 준비했기 때문에 유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쟁점별로 짚어보겠습니다.
의료 과실 소송에서 감정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법원 감정(진료기록감정) - 법원이 대한의학회 또는 해당 전문학회에 감정을 촉탁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이며, 재판부가 중립적 기관에 의뢰하므로 증거력이 높습니다.
사적 감정(자문의 소견) - 원고나 피고 측이 자체적으로 의료 전문가의 의견서를 받아 제출합니다. 법원 감정에 비해 증거력은 낮지만, 감정 신청의 근거 자료나 반박 자료로 활용됩니다.
A씨 사건에서는 소송 초기에 A씨 측 변호사가 신경외과 전문의에게 사적 감정을 먼저 받았습니다. 이 소견서를 근거로 법원에 공식 감정을 신청했고, 법원은 대한신경외과학회에 진료기록감정을 촉탁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감정 촉탁 시 어떤 질문(감정사항)을 넣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집니다. "수술 과정에서 과실이 있었는가"라는 막연한 질문보다, "수술 중 L4-5 부위 감압 과정에서 신경근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표준 술기를 준수했는가"처럼 구체적으로 물어야 실질적인 답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감정 절차를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소요 기간은 통상 3개월에서 6개월입니다. 감정기관이 바쁜 경우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합니다. A씨 사건에서는 감정 촉탁 후 약 5개월 만에 감정서가 회신되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분들이 당황합니다. 감정을 신청하는 쪽이 먼저 비용을 예납(미리 납부)해야 합니다. 신청 안 하면 감정이 진행되지 않으니, 사실상 원고가 부담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A씨의 경우, 법원 감정 비용으로 약 280만 원을 예납했고, 사전에 받은 사적 감정 비용 150만 원까지 합치면 감정 관련 비용만 총 430만 원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최종적인 비용 부담입니다. 소송에서 이기면, 패소한 상대방에게 소송비용 확정 절차를 통해 감정 비용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적 감정 비용은 소송비용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A씨는 승소 후 법원 감정 비용 280만 원은 B병원 측에 상환받았지만, 사적 감정 비용 150만 원은 자기 부담으로 남았습니다.
비용 부담 원칙 정리
- 감정 신청 단계: 신청인이 예납
- 판결 후: 패소자 부담 원칙 (민사소송법 제98조)
- 일부 승소 시: 승·패 비율에 따라 안분
- 사적 감정 비용: 소송비용으로 인정되지 않을 가능성 높음
감정서가 불리하게 나왔다고 끝이 아닙니다. 실무에서는 다음과 같은 대응이 가능합니다.
첫째, 보충감정 신청입니다. 감정서 내용이 불명확하거나 논리적 오류가 있는 부분에 대해 추가 질문을 하는 방식입니다. 비용은 보통 50만~100만 원 추가됩니다.
둘째, 감정인 신문입니다. 감정서를 작성한 의사를 법정에 불러 직접 질문하는 절차입니다. 감정서 내용의 모순점이나 근거의 부족함을 드러낼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지만, 잘못 활용하면 오히려 불리한 답변을 끌어낼 수 있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셋째, 재감정 신청입니다. 감정 결과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면 다른 기관에 재감정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다만 법원이 재감정을 허가하는 기준은 엄격합니다. 단순히 결과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는 허가되지 않으며, 감정 방법이나 절차에 명백한 하자가 있어야 합니다.
A씨 사건에서 B병원 측은 감정 결과에 불복하여 보충감정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보충감정에서도 "수술 과정에서 표준 술기를 벗어난 조작이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는 기존 결론이 유지되었고, 최종적으로 법원은 B병원의 과실을 인정하여 A씨에게 약 6,200만 원의 배상을 명했습니다.
의료 과실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면, 다음 세 가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진료기록 확보를 서두르십시오. 의료법 제21조에 따라 환자 본인은 진료기록 사본을 요청할 권리가 있습니다. 수술기록, 마취기록, 간호기록, 영상자료(CT·MRI) 등을 빠짐없이 확보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기록이 수정되거나 보존 기간이 만료될 수 있습니다.
둘째, 감정사항 작성에 공을 들이십시오. 앞서 말씀드렸듯이, 어떤 질문을 하느냐가 결과를 좌우합니다. 해당 진료 분야의 표준 치료 지침(가이드라인)을 사전에 파악하고, 그 기준에 비추어 구체적인 질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셋째, 비용 대비 효과를 냉정하게 판단하십시오. 감정 비용, 변호사 비용, 소송 기간(보통 1년 6개월에서 3년)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소송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감정 비용만 수백만 원이 드는데 예상 배상액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한국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통한 조정 절차(비용 무료)를 먼저 검토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