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기업과 물품 거래를 하면서 분쟁이 발생했을 때, 어떤 법이 적용되는지 몰라 혼란스러우셨던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CISG(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유엔협약)가 자동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약서를 체결했다가 뒤늦게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실무에서 자주 접합니다.
오늘은 가상의 사례를 통해 CISG의 적용 여부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되는지, 그리고 어떤 점에 주의해야 하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당사자 : 서울 소재 수입무역회사 A무역(대표 김모 씨, 48세) / 독일 뮌헨 소재 기계부품 제조사 B GmbH
거래 내용 : A무역이 B사로부터 산업용 정밀 기어부품 5,000개를 개당 120유로(총 60만 유로, 약 8억 7천만 원)에 매수하는 계약 체결
분쟁 발생 : 납품된 부품 중 약 1,200개에서 규격 불일치가 확인되었으나, B사는 자사 품질기준에 부합한다며 하자를 부인. A무역은 대금 감액과 손해배상을 요구
쟁점 : 계약서에 준거법 조항이 없었고, A무역은 한국 민법 적용을, B사는 독일 민법(BGB) 적용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CISG 적용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
많은 분들이 국제 거래에 CISG가 당연히 적용된다고 생각하시거나, 반대로 별도 합의가 있어야 적용된다고 오해하시곤 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CISG 제1조 제1항은 두 가지 경로로 적용 여부를 판단합니다.
(a) 직접 적용 : 매매계약의 양 당사자의 영업소가 각각 서로 다른 체약국(CISG 가입국)에 있을 때, 별도 합의 없이도 자동 적용됩니다.
(b) 간접 적용 : 국제사법 규칙에 따라 지정된 준거법이 체약국의 법인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 한국은 2005년에, 독일은 1991년에 CISG에 가입한 체약국입니다. A무역의 영업소는 한국, B사의 영업소는 독일이므로 제1조 제1항 (a)호에 따라 CISG가 자동 적용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양 당사자가 준거법에 관한 합의를 하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CISG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자동으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실무적으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CISG 제6조는 당사자들이 합의로 CISG의 적용을 전부 또는 일부 배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배제 합의의 방식과 명확성에 대해 분쟁이 빈번합니다.
계약서에 "본 계약에는 CISG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경우, 또는 "본 계약의 준거법은 대한민국 민법으로 한다"와 같이 특정 국내법을 준거법으로 명시하면서 CISG 배제 의사가 명확한 경우
단순히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한다"라고만 기재한 경우, 한국법에 CISG가 포함되므로 배제 의사가 불명확하여 오히려 CISG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A무역과 B사의 계약서에는 준거법 조항 자체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CISG 배제 합의가 존재하지 않아, CISG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실무에서 자주 보는 유형인데, 당사자들이 CISG의 존재를 모른 채 계약을 체결하면 의도와 다른 법률 체계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꼭 알아두셔야 합니다.
CISG가 적용될 경우, 물품의 하자에 관한 규율이 한국 민법이나 독일 민법과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가 A무역의 분쟁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자 통지 의무(CISG 제39조) : 매수인은 물품의 부적합(하자)을 발견했거나 발견했어야 하는 때로부터 합리적 기간 내에 매도인에게 통지해야 합니다. 이 기간을 도과하면 부적합을 주장할 권리 자체를 상실합니다.
최대 기간(CISG 제39조 제2항) : 물품 수령일로부터 최장 2년 이내에 통지해야 합니다.
한국 민법상 상사매매의 하자 통지 기간이 6개월인 것과 비교하면, CISG가 매수인에게 조금 더 유연한 기간을 부여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합리적 기간"이라는 모호한 기준 때문에, 실무에서는 통상 하자 발견 후 1개월 이내에 서면 통지를 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봅니다.
A무역은 부품을 검수한 후 약 3주 뒤에 B사에 이메일로 구체적 하자 내역을 통지했으므로, 통지 기간 요건은 충족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CISG상 매수인이 행사할 수 있는 구제 수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A무역의 경우 5,000개 중 1,200개(24%)가 규격 불일치이므로 대금 감액 청구와 손해배상 청구를 병행하는 것이 현실적인 전략입니다. 본질적 계약 위반 여부는 불일치의 정도와 A무역이 해당 부품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이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실무적 시사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해외 기업과의 거래가 점차 늘어나는 시대에, CISG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에 대비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특히 계약 금액이 수억 원 이상인 경우, 적용 법률의 차이가 분쟁 결과에 수천만 원 이상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