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호사협회 등록 형사전문, 민사전문 변호사입니다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원재료 공급계약에서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은 사고가 터진 뒤에 펴보면 이미 늦은 조항입니다.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 홍해 사태처럼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줄줄이 터지면서, 단순히 "천재지변 시 면책된다"고 한 줄 적어둔 계약서로는 손해를 막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불가항력 조항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지 막막해 합니다. 표준계약서를 그대로 베껴 쓰거나, 상대방이 보낸 초안에 도장만 찍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원재료 공급은 가격 변동·물류 차질·환율 급변·정부 규제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영역이므로, 불가항력 조항의 설계 방식에 따라 수억 원의 손해가 갈리기도 합니다.
아래는 실무에서 불가항력 조항을 처음부터 만들거나 검토할 때 따라야 할 7단계 절차입니다. 공급자(Seller)와 수요자(Buyer) 어느 쪽이든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불가항력 조항은 "무엇이 위험한지"를 정의하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원재료의 원산지, 대체 공급선의 존재 여부, 물류 경로, 수출입 규제 가능성을 표로 정리하세요. 예컨대 중국발 마그네슘, 러시아산 니켈, 대만 반도체 소재처럼 지정학적 리스크가 큰 품목은 별도 카테고리로 분류해야 합니다.
조항을 쓰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한정적 열거형(closed list), (2) 예시적 열거형(open list, "포함하되 이에 한정되지 않는다"), (3) 일반조항형. 공급자라면 가능한 넓게 예시적 열거형으로 가는 것이 유리하고, 수요자라면 한정적 열거형으로 좁히는 것이 유리합니다. 전염병, 정부 명령, 사이버 공격, 원자재 수출통제, 노동쟁의는 반드시 포함 여부를 검토해야 합니다.
불가항력이 발생해도 통지를 누락하면 면책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유 발생일로부터 며칠 이내에, 어떤 수단으로(서면·이메일·전자문서) 통지할지 구체적으로 적어야 합니다. 실무에서는 발생일로부터 7일 내 1차 통지, 14일 내 입증자료 송부가 가장 표준적입니다. 통지 의무 위반 시 면책 효력을 상실한다는 조항도 함께 넣어야 효과가 있습니다.
불가항력을 선언한 당사자도 손해 확대를 막을 합리적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대체 공급선 확보, 대체 운송수단 이용, 부분 이행 가능성 검토를 의무로 명시하세요. 이 조항이 없으면 "손 놓고 있다가" 면책을 주장하는 사례가 빈번합니다. 실무에서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인 노력(commercially reasonable efforts)"이라는 문구가 자주 사용됩니다.
불가항력의 "결과"를 단계별로 설계해야 합니다.
특히 가격 재협상 조항(hardship clause)은 불가항력과 구별되는데,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지만 이행이 불가능하지는 않은 상황을 다룹니다. 두 조항을 별도로 설계하지 않으면 가격 급등 리스크는 그대로 떠안게 됩니다.
준거법이 한국법인 경우와 영국법·뉴욕주법인 경우는 불가항력 해석이 다릅니다. 한국 민법은 채무자의 귀책사유 없는 이행불능 시 채무 소멸을 인정하지만, 영미법은 명시적 조항이 없으면 frustration 법리로만 처리되어 인정 범위가 훨씬 좁습니다. 국제 공급계약이라면 준거법에 맞춰 조항 문구를 조정해야 의도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중재 조항이 있다면 중재인이 hardship을 판단할 권한이 있는지도 점검해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는 "가상의 사고"를 넣어보는 일입니다. 코로나급 팬데믹이 다시 발생했다고 가정하고, 공급자가 통지부터 해지까지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간표를 그려보세요. 조항대로 했을 때 어느 쪽이 얼마의 손해를 떠안는지 계산이 나와야 합니다. 이 시뮬레이션을 거치지 않은 조항은 결국 분쟁 시 무용지물이 됩니다.
상담 현장에서 보면, 다음 네 가지가 누락된 계약서가 가장 많습니다.
위 네 가지만 점검해도 분쟁 발생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집니다. 표준계약서를 그대로 쓰는 대신, 자사 거래의 특성에 맞춰 조항을 재설계하는 것이 결국 비용을 가장 줄이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