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사·이혼 분쟁의 전략 설계와 실전 해결을 돕는 소송전략가 김범수 변호사
"오랜 거래 관계에 있던 부품공급사가 우리 회사 설계도를 경쟁사에 넘겼습니다. 어떤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부품을 외주 제작하다 보면 상세 설계도면이나 사양서(스펙시트)를 공급사에 전달할 수밖에 없는데, 그 과정에서 설계 정보가 제3자에게 유출되는 사례가 실무에서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NDA(비밀유지계약) 체결 여부와 관계없이 영업비밀 침해에 해당하면 민사상 손해배상과 형사 처벌까지 가능합니다. 다만 어떤 요건을 갖추었는지에 따라 구제 수단의 범위가 달라지므로, 아래에서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영업비밀보호법) 제2조 제2호에 따르면, 영업비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합니다.
비공지성 - 그 정보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아야 합니다. 해당 설계도가 이미 특허 공보나 기술 논문에 공개되었다면 비공지성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경제적 유용성 - 그 정보가 독립적인 경제적 가치를 가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설계도의 치수 공차, 소재 배합비, 특수 가공 방법 등이 경쟁 우위를 부여한다면 충족됩니다.
비밀관리성 - 상당한 노력에 의해 비밀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실무에서 이 요건이 가장 자주 문제됩니다. 설계도에 "대외비" 또는 "Confidential" 표시를 했는지, 열람 권한을 제한했는지, 전달 시 수량 관리를 했는지 등이 판단 기준이 됩니다.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춘 경우라면 NDA가 없더라도 영업비밀보호법에 의한 보호가 가능합니다. 반대로 비밀관리 조치를 전혀 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중요한 설계도라 하더라도 법적 보호를 받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NDA를 안 맺었으니 방법이 없는 것 아닌가"라고 걱정하시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NDA가 있는 경우
계약 위반에 따른 채무불이행 손해배상(민법 제390조)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NDA에 위약벌 조항이 있다면 실제 손해 입증 부담이 크게 줄어듭니다. 또한 영업비밀보호법에 의한 청구도 병행할 수 있어 이중으로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
NDA가 없는 경우
계약상 청구는 어렵지만, 영업비밀보호법상 요건을 충족하면 부정취득 또는 부정공개 행위로서 금지 청구 및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합니다. 다만 손해액 입증 부담이 상대적으로 크고, 비밀관리성 입증이 핵심 쟁점이 됩니다.
실무에서 보면 NDA를 체결했더라도 위약벌 금액이 너무 낮게 설정되어 있거나, 비밀 정보의 범위를 모호하게 규정해 둔 경우가 많습니다. NDA의 내용 자체가 부실하면 계약이 있어도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의 세심한 검토가 중요합니다.
설계도 유출이 확인된 경우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침해금지 가처분 - 유출된 설계도의 사용 중지 및 폐기를 구하는 가처분 신청이 가능합니다. 설계도가 이미 경쟁사에 넘어간 상황이라면 시간이 생명이므로 가처분을 먼저 검토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통상 신청 후 2~4주 내 심리가 진행됩니다.
민사 손해배상 청구 - 영업비밀보호법 제11조에 따라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손해액 산정이 어려운 경우 같은 법 제14조의2에 의해 침해자가 얻은 이익액을 손해액으로 추정할 수 있어, 피해 기업의 입증 부담이 완화됩니다.
형사 고소 - 영업비밀보호법 제18조에 따라 영업비밀 침해 행위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습니다. 해외 유출의 경우에는 15년 이하 징역 또는 15억 원 이하 벌금으로 가중됩니다.
계약상 위약벌 청구 - NDA에 위약벌 조항이 있다면 별도로 청구 가능합니다. 다만 위약벌 약정이 공서양속에 반할 정도로 과다한 경우 법원이 감액할 수 있으므로, 적정 수준의 금액을 설정해 두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설계도 유출 사건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증거 확보입니다. 실무에서 자주 접하는 문제점과 함께 핵심 포인트를 안내드립니다.
확보해야 할 핵심 증거
- 설계도 원본과 전달 이력 (이메일, 파일 전송 로그, 택배 수령증 등)
- 비밀관리 조치 자료 (대외비 표시, 접근권한 설정 기록, 보안서약서 등)
- 유출 정황 자료 (경쟁사 제품과의 설계 유사성 비교, 내부 제보, 퇴직자 동향 등)
- NDA 및 공급계약서 원본
- 해당 설계 기술의 경제적 가치를 입증할 자료 (개발 투입 비용, 매출 기여도 등)
특히 주의하실 점은, 유출 사실을 인지한 후 상대방에게 항의하기 전에 증거부터 확보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의를 먼저 하면 상대방이 증거를 인멸하는 경우가 실무에서 적지 않습니다. 디지털 포렌식이 필요한 경우도 있으므로, 전자 데이터의 원본 보전에 신경 쓰셔야 합니다.
모든 설계도 유출이 법적 책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청구가 기각될 수 있습니다.
첫째, 독자 개발(Independent Development)의 항변이 인정되는 경우입니다. 공급사가 자체 기술력으로 유사한 설계를 독립적으로 개발했음을 입증하면 영업비밀 침해가 성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역설계(Reverse Engineering)에 해당하는 경우입니다. 시판 제품을 분해하여 설계를 파악한 것이라면, 부정한 수단에 의한 취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NDA에서 역설계를 금지하고 있다면 계약 위반 책임은 별개로 발생합니다.
셋째, 비밀관리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비밀 표시 없이 누구나 접근 가능한 상태로 설계도를 관리했다면 영업비밀로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이미 유출이 발생한 상황에서의 대응도 중요하지만, 재발 방지를 위한 사전 조치도 함께 검토하시길 권합니다.
- 모든 설계도에 "대외비(Confidential)" 표시를 명확히 하고, 문서 버전과 배포처를 기록합니다.
- 공급사와의 NDA에 비밀 정보의 범위, 사용 목적 제한, 반환 의무, 위약벌을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 위약벌 금액은 예상 손해액의 1~3배 수준으로 설정하되, 과도하게 높으면 감액 위험이 있으므로 적정 수준을 산정해야 합니다.
- 설계도 전달 시 열람 전용 포맷(DRM 적용 PDF 등)으로 제공하고, 원본 CAD 파일의 전달은 최소화합니다.
- 주요 공급사에 대해서는 경업금지 조항까지 포함하는 것을 검토합니다. 다만 경업금지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으면 무효가 될 수 있으므로 업종, 지역, 기간을 합리적으로 한정해야 합니다.
부품공급사와의 거래는 장기적 신뢰 관계 위에 성립하지만, 법적 보호 장치를 사전에 마련해 두는 것이 그 신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유출이 발생했다면 증거 확보와 초기 대응의 시점이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므로, 가능한 빠른 시점에 전문가의 법적 검토를 받으시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민사·이혼 분쟁의 전략 설계와 실전 해결을 돕는 소송전략가 김범수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