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줄이고 결과로 입증합니다.
얼마 전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한 중소기업 대표가 제조설비를 3억 원에 매수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인도일까지 약 한 달이 남아 있었는데, 공장 화재로 해당 설비가 전소되었습니다. 매도인은 "이미 계약이 체결되었으니 대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매수인은 "물건을 받지도 못했는데 왜 돈을 내느냐"며 맞섰습니다.
결론은 계약서에 위험부담 조항이 어떻게 적혀 있느냐에 달려 있었습니다. 단 한 줄의 문구가 3억 원의 운명을 갈랐습니다. 매매계약서 서명 전, 아래 7가지 항목을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위험부담(Risk of Loss)이란, 매매 목적물이 당사자 쌍방의 귀책사유 없이 멸실 또는 훼손되었을 때 그 손해를 누가 부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민법 제537조는 "쌍무계약의 당사자 일방의 채무가 당사자 쌍방의 책임 없는 사유로 이행할 수 없게 된 때에는 채무자는 상대방의 이행을 청구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채무자위험부담주의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 우리 민법 원칙대로라면 물건을 넘겨줄 의무가 있는 매도인이 위험을 부담합니다. 그런데 실무에서는 계약 당사자 간의 합의로 이 원칙을 변경하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계약서 한 줄이 민법의 원칙을 뒤집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위험부담 조항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위험이 언제 매도인에서 매수인으로 넘어가느냐입니다. "인도 시", "검수 완료 시", "소유권 이전등기 완료 시" 등 다양한 기준이 가능합니다. 기준이 빠져 있으면 분쟁 발생 시 민법 원칙(채무자위험부담주의)으로 돌아가는데, 이것이 항상 유리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인도 시점과 소유권 이전 시점이 다른 거래일수록 명확한 기재가 필수입니다.
부동산 매매에서는 잔금 지급일에 소유권이전등기와 인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동산이나 대형 설비 거래에서는 물건의 인도(점유 이전)와 소유권 이전 시기가 수일에서 수주까지 벌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발생하는 멸실이나 훼손의 책임 소재를 반드시 특정해 두어야 합니다.
화재, 지진, 홍수 등 천재지변은 물론이고, 전쟁, 전염병, 정부의 규제 변경 등 어디까지를 불가항력(Force Majeure)으로 인정할 것인지 명시해야 합니다. "천재지변 기타 불가항력"이라는 포괄적 표현만 있으면, 예컨대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사안에서 해당 여부를 놓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는 5가지 이상의 구체적 사유를 열거하고, 마지막에 포괄 조항을 두는 방식이 권장됩니다.
목적물이 완전히 멸실된 경우뿐 아니라, 일부만 훼손된 경우의 처리도 중요합니다. 일부 훼손 시 매수인에게 계약 해제권이 있는지, 아니면 훼손 정도에 비례하여 대금을 감액할 수 있는지를 미리 정해 두어야 합니다. 이 부분이 누락되면 "수리 후 인도"를 놓고 추가 비용 부담 문제가 생기고, 인도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 분쟁까지 확대되는 일이 잦습니다.
계약 체결 후 인도일까지 매도인이 목적물을 어떤 수준으로 보관해야 하는지를 명시해야 합니다. 민법 제374조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를 요구하지만, 구체적인 보관 장소, 온도, 보안 조건 등은 계약서에서 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특히 정밀기기, 식품, 화학물질 등 보관 조건이 까다로운 물건의 경우, 보관의무 위반 시 위험부담과 별도로 손해배상 청구가 가능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고가의 목적물이라면 계약 체결 후 인도 완료 시까지 적하보험(운송 중) 또는 재산보험에 가입하도록 의무화하는 조항이 필요합니다. 보험 가입 의무자가 누구인지, 보험료는 누가 부담하는지, 사고 발생 시 보험금은 누구에게 귀속되는지를 모두 명시해야 합니다. 보험금 귀속 조항이 없으면, 위험 이전 전 사고가 발생했을 때 매도인이 보험금을 수령하면서 동시에 매수인에게 대금 지급을 요구하는 이중 이득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목적물에 멸실이나 훼손이 발생했을 때, 이를 상대방에게 언제까지 어떤 방식으로 통지해야 하는지를 규정해야 합니다. 실무에서는 "사고 인지 후 24시간 이내 서면(이메일 포함) 통지"와 같이 구체적으로 기재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통지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당사자에 대해 손해배상 의무를 가중하거나, 위험부담을 불리하게 전환하는 제재 조항을 함께 두면 실효성이 높아집니다.
위의 7가지 항목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습니다. 위험 이전 시점(1번)이 불명확하면 보관의무(5번)의 종기도 불분명해지고, 보험 가입 의무(6번)의 기간도 정할 수 없습니다. 불가항력 사유(3번)의 범위가 넓을수록 매도인에게 유리하고, 좁을수록 매수인에게 유리합니다. 따라서 이 7가지를 개별적으로 확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각 조항이 서로 일관성 있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반드시 검토해야 합니다.
민법의 위험부담 규정은 임의규정이므로 당사자 간 합의로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쪽에만 지나치게 불리한 조항은 신의성실 원칙(민법 제2조)이나 약관규제법에 의해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