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줄이고 결과로 입증합니다.
제조물 결함으로 다쳤거나 재산 피해를 입었을 때, 가장 어려운 관문은 바로 설계 결함의 입증입니다. 핵심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비자가 제품 설계도를 직접 분석해 결함을 증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제조물책임법(PL법)은 이 부담을 상당 부분 덜어주는 장치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은 가상의 사례를 통해 설계 결함을 어떻게 다투는지 구체적으로 짚어보겠습니다.
사례
대전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38세 자영업자 김모씨는 국내 소형가전 업체가 제조한 전기포트를 매장에서 사용하던 중, 물이 끓는 순간 손잡이 부위가 과열되며 화상을 입었습니다. 치료비와 영업 손실을 합쳐 약 1,200만원의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제조사는 "소비자가 물을 규정량 이상 담아 생긴 사용상 부주의"라고 주장했지만, 김씨는 동일 모델에서 유사 사고가 여러 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제조물의 결함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제조 과정에서 생긴 제조상 결함, 애초에 설계 자체가 잘못된 설계상 결함, 그리고 위험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표시상 결함입니다.
이 중 설계상 결함은 "합리적인 대체설계를 채용했더라면 피해를 줄이거나 막을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은 경우"를 말합니다(제조물책임법 제2조). 즉 김씨 사례에서 손잡이 부위에 단열 처리를 하거나 과열 차단 구조를 넣는 것이 기술적·비용적으로 충분히 가능했다면, 그런 대체설계를 하지 않은 것 자체가 결함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개별 제품 하나의 불량이 아니라 같은 모델 전체에 공통된 구조적 문제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동종 사고 이력이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과거에는 소비자가 결함의 존재와 인과관계를 모두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정보와 기술력에서 열세인 소비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합니다. 그래서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는 입증책임을 완화했습니다.
소비자가 다음 세 가지를 증명하면 결함과 인과관계가 추정됩니다.
1. 제품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는 상태에서 손해가 발생했다는 사실
2. 그 손해가 제조업자의 지배 영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
3. 그 손해가 결함 없이는 통상 발생하지 않는다는 사실
김씨는 포트를 설명서대로 사용했고, 물을 끓이는 것은 제품의 본래 용도이며, 손잡이 과열은 정상 제품이라면 통상 일어나지 않는 현상입니다. 이 세 가지가 인정되면 결함의 입증책임이 사실상 제조사로 넘어갑니다. 제조사가 "결함이 아니라 소비자 과실 때문"임을 반대로 증명하지 못하면 책임을 지게 됩니다.
입증책임이 완화되었다고 해도, 소비자가 아무 준비 없이 승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완화의 전제 사실을 뒷받침할 증거를 갖춰야 합니다.
특히 소송 단계에서는 법원의 제품 감정(전문기관이 결함 여부를 분석)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감정에서 대체설계 가능성이 확인되면 설계 결함 인정에 결정적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소비자가 제조사 수준의 기술 분석을 해낼 필요는 없습니다. "정상 사용 중 통상 일어나지 않을 손해가 발생했다"는 점을 증거로 뒷받침하면, 나머지 입증 부담은 제조사가 지게 됩니다.
다만 제조물책임법상 손해배상 청구권은 피해 사실과 배상의무자를 안 날부터 3년, 제조물이 공급된 날부터 10년 내에 행사해야 하므로 시효 관리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고 직후 제품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승패를 가르는 첫 단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