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포기와 함께 많이 활용되는 제도가 한정승인(상속받은 재산의 범위 안에서만 피상속인의 빚을 갚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정승인을 받은 뒤에도 고민은 끝나지 않습니다. 물려받은 재산은 한정되어 있는데 채권자가 여럿이라면, 누구에게 먼저 얼마를 갚아야 하는지가 문제되기 때문입니다. 이 상속채무 변제 선후 이행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상속인이 개인 책임을 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부산에 거주하는 회사원 김정훈 씨(44세)는 아버지가 남긴 상속재산 8,000만 원에 대해 한정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세 명의 채권자가 있었습니다. 근저당권을 설정한 은행에 5,000만 원, 사업상 거래처에 4,000만 원, 그리고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준 지인에게 3,000만 원의 채무가 있었습니다. 채무 총액은 1억 2,000만 원으로, 상속재산을 초과합니다. 김 씨는 먼저 연락해 온 지인에게 3,000만 원을 전부 갚았습니다. 이후 은행과 거래처가 변제를 요구하자 남은 재산이 5,000만 원뿐이라며 난감해졌습니다.
한정승인을 한 상속인이 가장 먼저 이해해야 할 점은, 상속채무 변제에는 임의로 정할 수 없는 법정 순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민법은 한정승인 후 변제 절차에서 채권자를 세 부류로 나누고, 그 순서에 따라 재산을 배당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먼저 온 사람에게 먼저 갚는다는 상식과는 다릅니다.
정리하면, 담보권자가 가장 먼저 변제받고, 그 다음 일반 채권자들이 채권액에 비례해 안분(按分, 비율대로 나눔)하여 변제받으며, 마지막으로 유증받은 사람이 받게 됩니다. 변제 기한이 먼저 도래한 채권이라는 이유로 순위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사례의 김 씨는 담보권자인 은행을 제쳐두고, 일반 채권자에 불과한 지인에게 3,000만 원을 전액 변제했습니다. 이는 변제 순위를 위반한 경우에 해당합니다.
민법 제1038조는 한정승인자가 법정 순위와 절차를 위반하여 변제함으로써 다른 채권자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을 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배상 책임이 상속재산의 범위를 넘어 상속인의 고유재산(자기 재산)으로도 부담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정승인의 가장 큰 목적은 상속인의 개인 재산을 보호하는 것인데, 변제 순위를 어기면 바로 그 보호막이 일부 벗겨지는 셈입니다.
사례에서 올바른 배당을 했다면, 담보권자인 은행이 담보 범위 내에서 우선 변제받고, 남은 재산을 거래처와 지인이 채권액 비율(4,000만 원 대 3,000만 원)에 따라 나누어 받았어야 합니다. 김 씨가 지인에게 전액을 몰아준 탓에 다른 채권자들이 받지 못한 금액이 발생했다면, 그 손해 부분을 김 씨 개인이 배상해야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민법은 절차를 마련해 두고 있습니다. 한정승인자는 한정승인을 한 날로부터 5일 이내에 일반적으로 2개월 이상의 기간을 정하여 채권자들에게 채권을 신고하라는 공고를 해야 합니다. 알고 있는 채권자에게는 개별적으로 신고를 최고(독촉)해야 합니다.
이 신고 기간이 끝나기 전에는 어느 채권자에게도 변제를 거절할 수 있습니다. 성급하게 먼저 온 채권자에게 변제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기간이 지난 후 신고한 채권과 파악된 채권을 종합하여, 앞서 설명한 순위에 따라 배당 변제를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실무에서 보면, 채권자 관계가 단순하고 재산이 채무를 충분히 덮는 경우에는 큰 분쟁 없이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사례처럼 채무가 재산을 초과하고 채권자가 여럿인 경우에는, 배당 순위와 비율 계산이 복잡해 상속인이 혼자 처리하다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한정승인 심판을 받은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이후의 변제 절차를 신중하게 진행하는 것이 상속인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