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줄이고 결과로 입증합니다.
얼마 전, 무역업을 하시는 한 대표님이 두툼한 영문 서류 뭉치를 들고 사무실을 찾으셨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법원에서 받은 승소 판결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표정은 결코 밝지 않았습니다. 외국판결을 받았는데, 정작 채무자의 재산이 모두 한국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이 사례를 통해 외국판결의 한국 집행 요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의류 부자재를 미국 LA의 B사에 수출하던 A주식회사(서울 소재, 대표 김모씨, 52세)는 약 87만 달러의 물품대금을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A사는 캘리포니아 주 법원에 소를 제기하여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전부승소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B사 대표 이모씨가 재미교포로서 서울 강남구에 아파트와 상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한국에서 강제집행을 시도하려 했습니다. 이때 가장 먼저 필요한 절차가 바로 집행판결이었습니다.
많은 의뢰인들이 오해하시는 부분입니다. 외국법원의 확정판결이라도 한국에서 곧바로 강제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민사집행법 제26조는 외국판결에 기한 강제집행을 위해서는 한국 법원의 집행판결이 필요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외국판결을 한국에서 사용하려면 한국 법원이 다시 한 번 그 판결을 검토하여 "이 외국판결에 따른 강제집행을 허용한다"는 별도의 판결을 받아야 합니다.
이때 한국 법원이 외국판결의 옳고 그름(본안)을 다시 심사하지는 않습니다. 민사소송법 제217조가 정한 승인요건을 충족하는지만 형식적으로 살펴봅니다. 이를 실무에서는 실질재심사 금지의 원칙이라 부릅니다. 따라서 "외국판결이 부당하다"며 본안 다툼을 다시 벌이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요건을 갖춰야 외국판결이 한국에서 승인·집행될까요. 민사소송법 제217조 제1항은 다음 네 가지를 요구합니다.
A사 사례에서는 피고 B사가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점을 두고 있었으므로 국제재판관할에 문제가 없었고, 송달도 캘리포니아 민사소송법에 따라 적법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캘리포니아 주는 한국과 상호보증이 인정되는 대표적 법역(法域)입니다. 다만 한 가지 쟁점이 있었는데, 미국 판결 중 일부에 포함된 변호사보수 부분이 과다한지 여부가 공서양속 심사 대상이 되었습니다.
집행판결 청구는 채무자의 보통재판적 소재지 또는 재산소재지의 지방법원 본원 합의부에 제기합니다(민사집행법 제26조 제2항). A사 사례에서는 채무자의 재산이 강남구에 있고 채무자 본인도 서울에 거주 중이었으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했습니다.
외국판결 정본 및 인증등본, 확정증명, 송달증명, 한국어 번역문(번역공증 권장), 상호보증 입증자료(현지 변호사 의견서 또는 학술자료), 청구취지·원인 기재 소장이 필요합니다. 모든 외국 공문서에는 아포스티유(Apostille) 또는 영사확인이 첨부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무에서 자주 접하는 또 하나의 쟁점은 소멸시효입니다. 외국판결이 확정되었더라도, 한국에서 집행판결을 청구하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시효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판결로 확정된 채권의 소멸시효는 10년이지만, 외국판결의 시효 기산점과 한국에서의 시효 적용에 관해서는 견해 대립이 있어 사안마다 신중히 따져봐야 합니다.
또한 집행판결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채무자가 재산을 처분하거나 은닉할 위험에 대비해야 합니다. 이 경우 한국 법원에 가압류를 별도로 신청하여 채무자의 부동산이나 예금을 보전해두는 것이 일반적인 실무 처리입니다. A사 사례에서도 집행판결 본안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강남구 아파트와 상가에 대한 가압류를 먼저 진행했고, 결과적으로 약 11개월에 걸친 본안 절차 끝에 집행판결을 받아 부동산 강제경매까지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판결의 한국 집행은 단순히 "이미 받은 판결을 들고 가는" 절차가 아닙니다. 한국 법원이 다시 한 번 형식적 승인요건을 심사하는 또 하나의 본안 소송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외국 소송 단계에서부터 송달 방식, 변론기일 통지, 판결 확정 절차를 한국 집행을 염두에 두고 챙겨두는 것이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