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진단과 분석, 결과로 증명합니다.
국제거래를 하시는 분들이라면 계약서 마지막 페이지의 관할 합의 조항 때문에 한 번쯤은 마음이 무거워지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분명 도장을 찍을 때만 해도 "분쟁이야 설마 일어나겠어" 하셨을 텐데, 막상 거래에 문제가 생기고 나면 "그 조항이 도대체 어디서 소송하라는 뜻이었지?" 하고 다시 들춰보게 되시죠.
특히 국제계약에서 국제계약 관할합의의 전속 여부는 어디에서 소를 제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핵심 쟁점입니다. 같은 문구처럼 보여도 "전속관할"인지 "비전속관할(부가적 합의)"인지에 따라 한국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지, 아니면 외국 법원에 가서 다퉈야 하는지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늘은 실무에서 자주 접하는 가상의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경기 화성에서 자동차 부품을 제조하는 A사(대표 김모씨, 47세)는 2년 전 독일 뮌헨 소재 B사와 약 320만 유로 규모의 부품 공급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영문으로 작성된 계약서 제18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Any disputes arising out of or in connection with this Agreement shall be submitted to the courts of Munich, Germany."
최근 B사가 정당한 사유 없이 약 14억 원 상당의 잔금 지급을 거절하자, A사는 한국에서 소송을 제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한국에서 부품을 제조해 인도했고, 증인과 자료가 모두 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A사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있을까요?
이 사례에서 가장 먼저 풀어야 할 매듭은, 계약서 제18조의 문구가 "오직 뮌헨 법원에서만" 다투기로 한 합의인지, 아니면 "뮌헨 법원에서도 다툴 수 있다"는 정도의 합의인지입니다. 이 구분이 바로 전속관할합의와 비전속(부가적) 관할합의의 차이입니다.
지정된 법원에서만 소송 가능
다른 법원의 관할권 배제
예: "shall have exclusive jurisdiction"
지정된 법원 외에도 소송 가능
법정관할에 추가하는 의미
예: "may be submitted to"
대법원은 일관되게 국제재판관할 합의가 전속적 합의가 되기 위해서는 당사자가 합의한 외국 법원이 그 사건과 합리적 관련성을 가질 것, 그리고 그 합의가 전속적이라는 의사가 명확히 드러날 것을 요구해 왔습니다. "shall be submitted to"라는 문구만으로는 전속성이 단정되지 않고, 계약 체결 경위·당사자의 의사·거래 관행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A사 사례에서는 "exclusive"라는 단어가 빠져 있고, B사 본점이 뮌헨에 있다는 사정 외에는 뮌헨 법원에서만 다투기로 했다는 명확한 의사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조항은 비전속적 관할합의로 해석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관할합의가 비전속적이라고 판단되면, 그다음 질문은 "그렇다면 한국 법원에 소를 제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입니다. 이때 적용되는 것이 국제사법 제2조입니다. 국제사법 제2조는 "당사자 또는 분쟁이 된 사안이 대한민국과 실질적 관련이 있는 경우" 한국 법원에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합니다.
실무에서 자주 검토하는 실질적 관련성의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계약상 의무 이행지(제조·인도지)
- 당사자의 주된 영업소 소재지
- 증거 및 증인 소재지
- 분쟁 해결의 효율성과 예측가능성
- 당사자 간 형평
A사의 경우 부품을 한국에서 제조해 출하했고, 품질·수량에 관한 증거자료와 직원들이 모두 국내에 있습니다. 더불어 미수금 회수라는 분쟁의 성격상 한국에서의 소송 진행이 합리적이라는 점이 충분히 뒷받침될 수 있습니다. 대표님께서 "우리 회사가 한국 회사인데 왜 독일까지 가야 하나" 하고 답답해하시는 마음, 충분히 이해됩니다. 비전속관할합의로 해석된다면 한국 법원에 소를 제기할 여지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어드려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 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B사의 자산이 독일에 있다면 결국 독일 법원에서 한국 판결의 승인·집행을 받아야 회수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독일은 외국판결 승인에 있어 상호보증을 요구하는데, 한국과 독일 사이에는 상호보증이 인정되어 온 것으로 평가됩니다. 다만 독일 법원이 "이 사건은 우리 법원의 관할이었는데 한국에서 판결이 났다"고 판단하면 승인을 거절할 위험도 있습니다. 즉 관할합의 해석 결과는 단순히 어디서 소송하느냐의 문제를 넘어, 최종 회수 가능성까지 좌우하는 문제인 셈입니다.
1. 한국 제소 후 독일에서 집행 절차 진행
2. 처음부터 뮌헨 법원에 제소(시간·비용은 크지만 집행 확실)
3. 보전처분(가압류)을 독일 자산에 먼저 시도
4. 협상·조정으로 분쟁 종결 모색
이런 사례를 다룰 때마다 안타까운 점은, 계약 체결 당시 한 줄만 더 신경 쓰셨더라면 분쟁 단계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서실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국제계약을 체결하실 때는 관할조항에 "exclusive" 또는 "non-exclusive"를 명시하시고, 가능하다면 준거법 조항과 분쟁해결 조항을 한 묶음으로 검토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중재(arbitration)와 법원 관할을 동시에 적어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실무에서 의외로 자주 봅니다.
이미 분쟁이 발생한 단계라면, 가장 먼저 계약서 원문(영문 또는 제3국어 원본)과 협상 과정의 이메일·드래프트를 모두 확보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할합의의 전속성 여부는 결국 당사자의 의사 해석 문제이기 때문에, 협상 단계의 자료가 결정적 증거가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A사처럼 "한국에서 소송하고 싶다"는 분명한 이익이 있는 경우, 비전속성을 뒷받침할 자료를 빨리 정리해두실수록 선택지가 넓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