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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판교에서 AI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30대 대표가 미국계 액셀러레이터로부터 5억 원 규모의 SAFE(Simple Agreement for Future Equity) 투자 제안을 받았습니다. 텀시트 한 장을 손에 들고 사무실을 찾아온 그는 "미국 본사에서 쓰던 표준 양식 그대로 쓰면 된다고 하던데, 한국에서도 문제없는 거 맞죠?"라고 물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미국 Y Combinator 표준 SAFE를 그대로 한국에 적용하면 상법상 무효가 될 위험이 적지 않습니다. 2020년 벤처투자촉진법 개정으로 조건부지분인수계약 형태의 SAFE가 제도적으로 인정되었지만, 일반 상법상 회사에 대한 투자나 계약 조항 설계에서는 여전히 정교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SAFE 투자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 반드시 점검해야 할 한국 상법상 쟁점을 정리해 드립니다.
2020년 벤처투자촉진법 시행령 개정으로 SAFE는 "조건부지분인수계약"이라는 이름으로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제도를 활용하려면 피투자회사가 벤처기업 또는 창업기업이어야 하고, 투자자가 벤처투자조합·창업투자회사 등 적격 투자자여야 합니다. 일반 개인 엔젤이나 외국계 펀드가 일반 주식회사에 SAFE 형태로 투자하는 경우에는 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므로, 상법상 일반 계약으로서의 유효성을 별도로 검토해야 합니다.
SAFE는 향후 후속 라운드 때 할인율(Discount)을 적용해 더 낮은 단가로 주식을 받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한국 상법 제417조는 신주를 액면가 미만으로 발행하려면 주주총회 특별결의와 법원 인가를 요구합니다. 전환 시 산출되는 주당 가격이 액면가(통상 100원 또는 500원) 미만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사전에 무액면주식으로 정관을 변경하거나 액면가를 인하해 두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SAFE가 전환될 때 보통주가 발행될지, 후속 라운드 투자자와 같은 종류주식(상환전환우선주 등)이 발행될지 명확히 해야 합니다. 한국 상법은 종류주식에 부여할 수 있는 권리(우선배당·잔여재산분배·전환·상환·의결권 제한)를 정관에 미리 규정하도록 요구합니다(상법 제344조). 정관에 근거 없는 종류주식은 발행 자체가 무효이므로, SAFE 체결 단계에서 정관 정비 일정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밸류에이션 캡은 후속 라운드 평가액이 일정 금액을 초과하더라도 캡 가격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 조항입니다. 실무에서 자주 접하는 분쟁은 "Pre-money Cap이냐 Post-money Cap이냐"의 해석 차이입니다. 2018년 Y Combinator가 Post-money SAFE로 표준을 변경한 이후, 어느 기준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창업자 지분이 5~10%포인트까지 차이날 수 있으므로 계약서에 명시적으로 기재해야 합니다.
SAFE는 후속 투자 라운드, M&A, IPO 등 일정 사건이 발생하면 자동 전환되도록 설계됩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실제 신주 발행이 이루어지려면 이사회 결의, 신주발행통지, 납입절차가 필요합니다(상법 제416조 이하). 자동 전환을 약속해도 회사 측이 협조하지 않으면 강제이행이 쉽지 않으므로, 계약서에 의무 위반 시 손해배상액 예정 조항이나 이사회 사전 동의 조항을 함께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SAFE 투자 후 회사가 청산되거나 매각될 경우, 투자금을 어떤 순위로 회수할지 정해두어야 합니다. 일반 SAFE는 청산 시 투자원금 반환을 요구할 수 있도록 설계되지만, 한국 상법상 주식이 발행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주주가 아니므로 잔여재산분배청구권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계약상 채권적 청구권(원금반환 조항)을 명확히 두어야 분쟁을 막을 수 있습니다.
SAFE는 "부채도 자본도 아닌" 중간 형태라 회계처리가 까다롭습니다. K-IFRS상 전환 조건에 따라 금융부채로 분류되어 회사 재무제표에 부채로 잡힐 수 있고, 이는 후속 투자 유치 시 부채비율에 영향을 줍니다. 또한 외국 투자자로부터 받은 SAFE 자금은 외국환거래법상 증권 취득 신고 대상인지, 금전대차 신고 대상인지 사전에 분류해야 추후 환전·송금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SAFE는 간단한 계약이라 변호사 검토가 필요 없다"는 인식이 가장 위험합니다. 명칭은 "Simple"이지만, 한국 상법·벤처투자법·외국환거래법·세법이 교차하는 복합 계약입니다. 특히 후속 라운드 투자자가 SAFE 보유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면, 전환 자체가 분쟁의 대상이 됩니다.
실제로 시리즈 A 단계에서 리드 투자자가 "기존 SAFE 조건이 너무 투자자 친화적이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재협상을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이 경우 SAFE 보유자와 창업자, 신규 투자자 사이의 삼자 협상으로 번지며, 자금 조달이 수개월 지연되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 그 대표는 결국 표준 양식을 그대로 쓰지 않고, 정관 변경과 종류주식 근거 마련, Post-money 기준 명시, 청산 시 원금반환 조항 추가 등 7개 조항을 보완한 뒤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6개월 후 시리즈 A를 유치할 때, 리드 투자자로부터 "SAFE 조건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어 진행이 수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SAFE는 빠른 자금 조달이라는 분명한 장점이 있지만, 그 "빠름"이 향후 회사의 자본구조 전체를 흔드는 부메랑이 되지 않으려면 계약서 한 줄 한 줄의 한국법적 효력을 검증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