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줄이고 결과로 입증합니다.
얼마 전 한 중견 수출기업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동남아 현지 바이어와 3년간 순조롭게 진행되던 OEM 납품 계약이 갑자기 틀어지면서, 미수금 약 12억 원이 회수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계약서를 열어 보니 분쟁해결 조항은 단 두 줄, "양 당사자 간 분쟁은 바이어 소재지 법원의 전속관할로 한다"가 전부였습니다.
이 회사가 현지 법원에서 소송을 진행하려면 수억 원대의 현지 변호사 비용과 수년에 걸친 시간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만약 계약 체결 당시 분쟁해결 조항을 멀티스텝(Multi-Step) 구조로 설계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멀티스텝 분쟁해결 조항(Multi-Tiered Dispute Resolution Clause, 이하 MTDR 조항)은 분쟁이 발생했을 때 하나의 해결 방법만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별로 순차적 해결 절차를 밟도록 설계한 계약 조항입니다. 국제상사계약에서는 통상 2단계에서 4단계까지 구성하며, 각 단계에 기한과 조건을 명시합니다.
ICC(국제상업회의소)의 2024년 분쟁해결 통계에 따르면, 국제중재에 회부된 사건 중 약 30%가 멀티스텝 조항을 포함한 계약에서 발생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선행 절차(협상, 조정)에서 사실상 해결되어 본안 중재까지 진행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분쟁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최종적인 강제 집행 수단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조항의 핵심 장점입니다.
국제거래 실무에서 자주 채택되는 MTDR 조항의 전형적인 단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멀티스텝 조항이 아무리 정교하게 보여도, 실무에서 흔히 발생하는 함정을 피하지 못하면 오히려 분쟁 해결을 지연시키는 걸림돌이 됩니다.
1. 선행 절차의 이행 조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할 것
"양 당사자는 성실히 협상한다"와 같은 추상적 문구만으로는, 일방이 선행 절차를 이행하지 않았다며 중재판정부의 관할권 자체를 다투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예컨대 "통지 후 30일 이내에 양측 CEO 레벨 회의를 최소 1회 개최한다"처럼 구체적 요건과 기한을 정해야 합니다.
2. 각 단계의 종료 시점(Trigger)을 명확히 할 것
조정이 언제 끝나고 중재가 언제 시작되는지 불분명하면, 상대방이 절차 흠결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조정인이 조정 불성립 통지를 발송한 날로부터 30일 이내에 중재를 신청한다"와 같은 트리거 조건이 필수적입니다. 기한 미설정 시, 조정 단계에서 수개월이 소모되는 사례를 실무에서 드물지 않게 접하게 됩니다.
3. 긴급 임시처분(Emergency Relief) 경로를 별도로 확보할 것
지식재산 침해, 계약 위반에 따른 긴급 이행 금지 등 시급한 보전 조치가 필요한 경우, 멀티스텝 절차를 전부 거치다가는 권리 보전 시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긴급 임시처분 신청은 선행 절차와 무관하게 직접 중재기관 또는 관할 법원에 제기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반드시 두어야 합니다.
국제중재 실무에서 선행 절차 미이행이 중재판정 취소 또는 집행 거부 사유가 되는지에 대해서는 법역(法域)마다 입장이 다릅니다. 싱가포르, 홍콩 법원은 선행 절차 조건을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프랑스 법원은 조정 전치 조항의 위반이 중재관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는 판결례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 중재지(seat of arbitration)를 어디로 정하느냐에 따라 MTDR 조항의 실효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중재지의 법률이 선행 절차 불이행을 관할권 결격 사유로 볼 가능성이 있다면, 선행 절차의 이행 요건을 더욱 명확히 기재해야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글로벌 공급망이 복잡해지고 크로스보더 거래가 증가하면서, 단일 소송 관할이나 단순 중재 조항만으로는 분쟁 비용과 리스크를 통제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ICC는 2024년부터 "조정 후 중재(Med-Arb)" 통합 규칙을 강화했고, SIAC(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와 SIMC(싱가포르 국제조정센터)의 Arb-Med-Arb 프로토콜은 조정합의에 중재판정과 동일한 집행력을 부여하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국내 기업의 해외 거래 비중이 매년 증가하는 추세에서, 멀티스텝 분쟁해결 조항은 계약서 끝부분에 관행적으로 넣는 표준 문구가 아니라, 분쟁 발생 시 기업의 비용과 시간을 결정짓는 핵심 조항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계약 체결 전 분쟁해결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충분히 검토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