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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사·계약 국제거래·국제중재·판결집행
민사·계약 · 국제거래·국제중재·판결집행 2026.04.19 조회 42

해외 에스크로 대금지급, 계약서 한 줄이 수억 원을 좌우한 사례

강성중 변호사

오늘은 해외 에스크로(Escrow) 대금지급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실무적 문제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국제거래에서 에스크로는 매수인과 매도인 사이에 제3의 중립 기관이 대금을 보관하고, 계약 조건 충족 시 대금을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안전한 거래 수단으로 알려져 있지만, 계약서의 조건 설정이 부실하면 오히려 분쟁을 키우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건 개요: 3억 원이 묶인 에스크로 계좌

당사자: A씨(42세, 서울 소재 IT 솔루션 기업 대표) / B사(싱가포르 소재 SaaS 플랫폼 개발업체)

거래 내용: A씨는 B사가 개발한 클라우드 기반 물류관리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USD 230,000(약 3억 1천만 원)에 매수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에스크로 구조: 홍콩 소재 에스크로 에이전트 C사를 통해, A씨가 대금 전액을 에스크로 계좌에 예치한 뒤 B사의 납품 완료 시 대금이 방출(release)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분쟁 발생: B사는 소프트웨어를 납품했다고 주장했으나, A씨는 사전에 합의한 한국어 로컬라이제이션(현지화) 작업이 완료되지 않았다며 대금 방출을 거부했습니다. 에스크로 에이전트 C사는 양측의 주장이 상충하자 대금을 동결한 채 6개월 이상 지급을 보류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핵심 쟁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에스크로 방출 조건의 해석 문제, 둘째 에스크로 에이전트의 책임 범위, 셋째 준거법과 분쟁 해결 절차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쟁점 1: 에스크로 방출 조건(Release Condition)의 모호성

이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에스크로 계약서에 명시된 방출 조건이 지나치게 추상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계약서 원문(요약): "Funds shall be released upon Seller's completion of deliverables as specified in Exhibit A."

(대금은 매도인이 별첨 A에 명시된 납품물을 완료한 시점에 방출된다.)

문제는 별첨 A(Exhibit A)의 내용이었습니다. 별첨 A에는 "Software License + Localization Package"라고만 기재되어 있었고, 한국어 로컬라이제이션의 구체적 범위 즉 번역 대상 화면 수, 기술 문서 포함 여부, 검수 기준 등이 명시되지 않았습니다.

B사는 UI(사용자 인터페이스) 메뉴 항목의 한국어 번역만으로 로컬라이제이션이 완료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A씨는 사전 협의 과정에서 기술 매뉴얼 번역과 한국 결제 시스템 연동까지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실무에서 이런 사례는 매우 빈번합니다. 국제 에스크로 거래에서 방출 조건은 객관적이고 검증 가능한 기준(verifiable criteria)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방식이 바람직합니다.

첫째, 납품물의 물리적 범위를 항목별로 열거합니다. "UI 번역 완료(대상 화면 47개)" "기술 문서 번역 완료(총 120페이지)"와 같이 수량화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둘째, 검수(인수테스트) 절차와 기간을 명시합니다. "매수인은 납품일로부터 14영업일 내에 서면으로 하자 통지를 하고, 통지 없을 시 인수 완료로 간주한다" 등의 조항이 필요합니다.

셋째, 부분 인수와 단계별 방출(milestone release) 구조를 활용합니다. 전체 대금을 한 번에 방출하는 대신, 계약 체결 시 30%, 1차 납품 시 40%, 최종 검수 완료 시 30%와 같이 분할하면 리스크가 분산됩니다.

쟁점 2: 에스크로 에이전트의 역할과 책임 한계

A씨는 에스크로 에이전트 C사에 대해 "왜 납품 완료 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분쟁을 방치하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에스크로 에이전트는 원칙적으로 기계적 역할(ministerial function)만 수행합니다. 즉, 계약서에 명시된 조건이 충족되었는지 서류상으로 확인하고 대금을 방출하는 것이 전부이며, 실질적 분쟁의 당부(當否)를 판단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C사의 에스크로 약관(Escrow Agreement)에도 이 점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에이전트는 당사자 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양 당사자의 공동 서면 지시 또는 관할 법원이나 중재판정부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대금을 보유한다(interpleader clause)."

이 조항에 따라 C사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실무적으로 에스크로 에이전트가 일방 당사자의 주장만으로 대금을 방출하거나 반환하면,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계약 위반 또는 불법행위 책임을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크로 계약을 설계할 때는 다음 사항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 분쟁 발생 시 대금의 처리 절차를 구체적으로 정합니다. 일정 기간(예: 30일) 내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동으로 중재 절차에 회부된다는 조항을 포함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둘째, 에이전트의 수수료 구조를 확인합니다. 분쟁으로 보관 기간이 장기화되면 추가 보관 수수료(holding fee)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6개월간 약 USD 4,500의 추가 수수료가 청구되었습니다.

셋째, 에이전트의 면책 범위를 확인합니다. 대부분의 에스크로 약관은 에이전트의 책임을 고의 또는 중과실로 한정하고 있어, 단순한 지연 보관만으로는 손해배상 청구가 어렵습니다.

쟁점 3: 준거법 선택과 분쟁 해결 절차의 중요성

이 사건에서 또 하나의 실무적 난제는 어느 나라 법률을 기준으로, 어디서 분쟁을 해결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에스크로 계약의 준거법은 홍콩법이었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계약의 준거법은 싱가포르법이었습니다. A씨의 회사는 한국 법인이었습니다. 세 개의 관할이 얽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국제 에스크로 거래에서는 본 계약(underlying contract)과 에스크로 계약의 준거법, 분쟁 해결 방식을 일치시키는 것이 실무상 매우 중요합니다. 준거법이 다르면 소송이나 중재를 별도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A씨 측 변호사는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SIAC)에 중재를 신청했습니다.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계약서에 SIAC 중재조항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스크로 계약에는 별도의 중재조항이 없었고 홍콩 법원의 전속관할이 규정되어 있어서, 에스크로 대금의 방출 명령을 받기 위해서는 홍콩 법원에 별도 절차를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A씨는 싱가포르 중재와 홍콩 법원 절차를 병행하게 되었고, 법률 비용만 약 USD 85,000(약 1억 1천만 원)이 발생했습니다. 분쟁 금액 대비 과도한 비용이 소요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실무적 조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본 계약과 에스크로 계약의 준거법 및 분쟁 해결 조항을 반드시 통일합니다. 특히 중재조항을 사용할 경우, 양 계약 모두에 동일한 중재기관과 중재지를 명시해야 합니다.

둘째, 에스크로 에이전트를 중재 절차에 참여시킬 수 있는 조항(joinder clause)을 에스크로 계약에 포함하는 것을 검토합니다. 이를 통해 중재판정부가 에스크로 대금 방출까지 한 번에 명령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거래 금액이 USD 100,000 이하인 경우에는 신속중재(expedited arbitration) 또는 간이 분쟁 해결 조항을 두어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무에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핵심 사항 정리

위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 해외 에스크로 대금지급은 단순히 "안전한 제3자 보관"이 아니라 정교한 계약 설계가 전제되어야 하는 거래 구조입니다. 핵심 사항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방출 조건의 구체성: 납품물의 범위, 검수 기준, 인수 기간, 하자 통지 절차를 수량화하고 기한을 명시해야 합니다. "completion"이나 "satisfaction"과 같은 추상적 표현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단계별 지급 구조: 전액 일시 방출보다 마일스톤 방식의 분할 방출이 매수인과 매도인 모두에게 리스크를 줄여 줍니다.

에이전트 약관 검토: 에스크로 에이전트의 표준약관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분쟁 시 처리 절차, 추가 수수료, 면책 범위를 사전에 협상해야 합니다.

준거법과 분쟁 해결의 통일: 본 계약과 에스크로 계약의 준거법, 중재조항, 관할을 일치시켜야 분쟁 시 절차가 이원화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외국환거래법 등 국내 규제 확인: 한국 기업이 해외 에스크로를 이용할 경우, 외국환거래법상 자본거래 신고 의무, 해외 송금 한도, 세무 보고 의무 등도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신고 누락 시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습니다.

해외 에스크로 거래는 계약 체결 전 단계에서 법률 검토가 이루어져야 효과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으며, 특히 방출 조건과 분쟁 해결 조항은 계약서에서 가장 세밀하게 다루어야 할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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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중 변호사의 코멘트
해외 에스크로 분쟁을 다루다 보면, 대부분의 문제가 방출 조건의 모호함에서 시작됩니다. 계약서 한 줄의 표현이 수억 원의 대금 동결로 이어지는 경우를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국제거래 에스크로 계약은 체결 전 단계에서 반드시 국제거래 전문 변호사의 검토를 받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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