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변호사협회 등록 형사전문, 민사전문 변호사입니다
국제 상사 계약서에 분쟁해결 조항을 넣으면서 "협상 먼저, 안 되면 조정, 그래도 안 되면 중재"라는 이른바 멀티스텝 분쟁해결 조항(Multi-Tier Dispute Resolution Clause)을 사용하는 기업이 늘고 있습니다. 취지는 좋지만, 조항을 제대로 설계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선행 단계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중재 절차 자체를 지연시키거나 무산시킬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멀티스텝 조항은 각 단계의 기한, 트리거 조건, 실패 판정 기준이 명확하지 않으면 오히려 독이 됩니다.
사건 개요
서울 소재 IT 솔루션 기업 A사(대표 김모 씨, 42세)는 싱가포르 소재 B사와 연간 15억 원 규모의 SaaS 구독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계약서 제18조 분쟁해결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멀티스텝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단계: 양사 CEO급 협상 / 2단계: 싱가포르 조정 센터(SIMC) 조정 / 3단계: SIAC 중재
B사의 2분기 라이선스료 약 3억 8,000만 원이 90일 이상 미지급되자, A사는 곧바로 SIAC에 중재를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B사는 "1, 2단계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중재 관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항변했습니다.
핵심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국제 중재 실무에서 멀티스텝 조항의 선행 단계(협상, 조정)가 관할 요건(jurisdictional prerequisite)인지, 아니면 단순한 절차적 의무(procedural requirement)인지는 해석에 따라 결과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관할 요건으로 해석될 경우 - 선행 단계 미이행 시 중재판정부가 관할 자체를 부정할 수 있습니다. A사처럼 곧바로 중재를 신청하면 각하(dismiss)될 위험이 있습니다.
절차적 의무로 해석될 경우 - 중재판정부는 관할을 인정하되, 선행 단계를 이행하라고 절차 정지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결국 시간과 비용이 추가됩니다.
A사 사건에서 B사 측 대리인은 조항의 문언이 "shall first attempt to resolve by negotiation"(반드시 먼저 협상을 통해 해결을 시도하여야 한다)이라는 의무형 표현을 사용했으므로 관할 요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실무에서는 "shall"과 "may", "endeavour" 등 동사 하나의 차이가 결정적입니다.
A사 계약서의 가장 큰 문제는 각 단계에 기한(time limit)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CEO급 협상"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 몇 일 이내에 개시해야 하는지, 몇 일간 협상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지가 전혀 명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발생하는 실무적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A사 사건에서 중재판정부는 결국 1단계 협상 조항이 기한과 구체적 절차를 결여하여 집행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중재 관할을 인정했지만, 이 판단이 나오기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고 A사는 그 기간의 법률 비용만 약 8,000만 원을 추가 부담해야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멀티스텝 조항이 실제로 기능하려면 각 단계마다 5가지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A사 사건을 기준으로, 제대로 작성된 조항과 그렇지 않은 조항을 비교하면 차이가 명확합니다.
"The parties shall first attempt to resolve any dispute by negotiation between senior executives. If negotiation fails, the parties shall submit the dispute to mediation. If mediation fails, the dispute shall be referred to SIAC arbitration."
"... negotiation within 30 days from the Notice of Dispute. If not resolved within such period, or if the respondent fails to designate a representative within 10 business days, either party may refer the dispute to mediation under SIMC Rules. If mediation is not concluded within 60 days, either party may commence arbitration under SIAC Rules. Nothing in this clause shall prevent either party from seeking emergency interim relief."
실무적 핵심 정리
1. 멀티스텝 조항의 각 단계에 명확한 기한과 자동 에스컬레이션 메커니즘이 없으면, 상대방의 지연 전략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2. "shall"을 사용하되 기한과 실패 조건을 함께 명시하면 의무성과 실행가능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습니다.
3. 긴급 보전처분 예외(carve-out)를 빠뜨리면, 채권 보전이 시급한 상황에서 수개월을 협상과 조정에 소비해야 할 수 있습니다.
4. 준거법에 따라 멀티스텝 조항의 해석이 달라지므로, 분쟁해결 조항의 준거법(law governing the arbitration agreement)도 별도로 지정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사는 최종적으로 중재 관할이 인정된 후 본안 심리에서 미지급 라이선스료 전액과 지연이자를 인용받았습니다. 그러나 관할 다툼에만 5개월과 8,000만 원의 비용이 추가된 것은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 충분히 방지할 수 있었던 손실입니다. 국제 계약의 분쟁해결 조항은 계약 체결 시 가장 마지막에 급하게 넣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분쟁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검토되는 조항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대한변호사협회 등록 형사전문, 민사전문 변호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