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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사·계약 국제거래·국제중재·판결집행
민사·계약 · 국제거래·국제중재·판결집행 2026.06.10 조회 24

불가항력 조항 적용 분쟁, 국제거래에서 실제 어떻게 다퉈지나

김경진 변호사
법무법인 초원 · 서울특별시 강남구

국제거래 계약서에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을 넣어두었으니 안심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예상치 못한 사태가 터졌을 때, 이 조항이 정말 내 편이 되어줄까요? 막상 분쟁이 발생하면 불가항력 조항의 적용 범위를 놓고 당사자 간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가상의 사례를 통해, 국제거래에서 불가항력 조항이 어떤 쟁점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건 개요 : A사와 B사의 부품 공급 계약

서울에 본사를 둔 전자부품 제조업체 A사(매도인)는 독일 뮌헨의 자동차 부품 유통기업 B사(매수인)와 2023년 3월, 반도체 관련 핵심 부품 50만 개를 단가 12달러, 총 계약금액 600만 달러(약 82억 원)에 공급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납품 기한은 2024년 6월 말이었습니다.

계약서에는 ICC(국제상업회의소) 모델 불가항력 조항을 기초로 한 Force Majeure Clause가 포함되어 있었고, 분쟁 발생 시 싱가포르 국제중재센터(SIAC)에서 중재로 해결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습니다.

계약서 불가항력 조항 핵심 내용

-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정부의 수출입 제한 조치 등 당사자가 합리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유로 이행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해진 경우, 해당 기간만큼 이행의무가 유예된다.

- 불가항력 사유 발생 시 14일 이내 서면 통지 의무가 있다.

- 불가항력이 6개월 이상 지속되면 양 당사자 모두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

문제는 2024년 초, A사의 주력 생산시설이 위치한 지역에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공장의 생산라인 일부가 파손되었고, 복구에 약 4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었습니다. A사는 지진 발생 10일 후 B사에 불가항력 사유를 통지하며, 납품 기한을 4개월 연장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B사는 A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B사 측은 A사에 다른 공장이 있고, 일부 물량은 외주 생산이 가능하므로 이행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며, 납품 지연에 따른 손해배상 약 200만 달러를 청구했습니다. 결국 양 당사자는 SIAC 중재를 신청하게 되었습니다.

쟁점 1 : 지진이 계약상 불가항력 사유에 해당하는가

가장 먼저 다퉈지는 부분은, 발생한 사건이 계약서에 명시된 불가항력 사유의 범위에 포함되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 사안에서 계약서는 '자연재해'를 불가항력 사유의 하나로 명시하고 있었으므로, 지진 자체가 포함되는지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었습니다. 다만 B사는 다음과 같은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A사 공장 소재지는 과거에도 지진이 발생한 이력이 있다. 따라서 이는 '예견 불가능한' 사유가 아니며, A사가 사전에 내진 설비 강화 등 대비책을 마련했어야 한다."

불가항력의 핵심 요건 중 하나가 바로 예견 불가능성(unforeseeability)입니다. 단순히 자연재해라는 유형에 해당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계약 체결 당시 합리적으로 예견할 수 없었는지가 함께 판단됩니다.

실무에서는 해당 지역의 재해 발생 빈도, 규모의 이례성, 업계 통상적인 대비 수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합니다. 이 사안의 지진이 역대급 규모로 해당 지역에서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면 A사에게 유리하게 판단될 가능성이 높고, 빈번하게 발생하는 규모였다면 A사의 예방 의무 위반이 문제될 수 있습니다.

쟁점 2 : 이행이 '불가능'한 것인가, 단지 '곤란'한 것인가

이 쟁점이 실무에서 가장 치열하게 다퉈지는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B사의 주장처럼 A사에 다른 생산시설이 존재하거나 외주 생산 경로가 있다면, A사의 이행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만 이 계약의 불가항력 조항은 이행이 불가능한 경우뿐 아니라 '현저히 곤란해진 경우'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핵심 판단 기준

- 대체 생산시설의 실질적 가동 가능 여부 (설비 호환성, 인력, 인허가)

- 외주 생산 시 추가 비용의 규모 (계약금액 대비 몇 %인지)

- 대체 이행에 소요되는 기간이 합리적 범위 내인지

- 제품 품질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예를 들어, A사의 다른 공장이 해당 부품 생산 설비를 갖추고 있지 않아 라인 전환에 3개월이 걸리고, 외주 생산 시 단가가 기존의 2배로 올라간다면 이는 '현저히 곤란한 경우'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2주 내 대체 생산이 가능하고 추가 비용이 10% 수준이라면, 불가항력 주장은 받아들여지기 어렵습니다.

국제거래 실무에서는 이 판단이 단순한 흑백논리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로 다뤄진다는 점을 이해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쟁점 3 : 통지 의무를 적절히 이행했는가

불가항력 조항에는 거의 예외 없이 통지 의무(Notice Requirement)가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불가항력 사유 자체가 인정되더라도 그 효과를 주장할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안에서 계약서는 '14일 이내 서면 통지'를 요구했고, A사는 지진 발생 10일 후에 통지했으므로 기한 자체는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통지의 내용적 충실성도 함께 심사됩니다.

1
사유 특정
어떤 불가항력 사유가 발생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재
2
영향 범위
계약 이행에 미치는 구체적 영향과 예상 지연 기간
3
경감 노력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취한 조치 및 계획

A사가 단순히 "지진이 발생하여 납품이 지연됩니다"라고만 통지했다면, 통지 의무를 형식적으로만 이행한 것으로 보아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면 피해 현황 보고서, 복구 일정표, 대체 이행 방안 검토 결과 등을 함께 제출했다면, 통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것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사례에서 얻을 수 있는 실무적 교훈

계약 체결 단계에서의 대비

- 불가항력 사유를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열거하되, 포괄 조항(catch-all clause)도 함께 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 '이행 불가능'뿐 아니라 '이행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까지 적용 범위를 넓혀두면, 매도인 입장에서 보다 넓은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 통지 기한, 통지 방법(이메일 가능 여부, 수신인 지정 등), 첨부 서류 요건까지 명확히 정해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불가항력 사유 발생 후 대응

- 통지는 기한 내, 그리고 최대한 상세하게 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실무에서는 통지 누락이나 지연으로 불가항력 주장 자체가 배척되는 사례가 꽤 있습니다.

- 손해경감의무(duty to mitigate)를 다하고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대체 생산 검토, 부분 납품 협의 등)를 반드시 남겨두셔야 합니다.

- 상대방과의 커뮤니케이션 기록은 중재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이메일, 공문 등 서면 기록을 빠짐없이 보관하시기 바랍니다.

국제거래에서의 불가항력 분쟁은 계약서 문언 해석, 준거법, 중재기관의 판단 기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계약서 작성 단계부터 발생 가능한 리스크 시나리오를 충분히 검토하시고, 실제 사유 발생 시에는 초기 대응이 결과를 좌우한다는 점을 꼭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경진
김경진 변호사의 코멘트
법무법인 초원 · 서울특별시 강남구
국제거래 분쟁을 다루면서 느낀 점은, 불가항력 조항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하시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통지 시점과 내용, 손해경감 노력의 증거 확보 여부가 승패를 가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계약서 검토 단계부터 전문가의 조력을 받으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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