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줄이고 결과로 입증합니다.
얼마 전 이런 사연이 있었습니다. 국내 중견 화학소재 기업이 중동 지역 바이어와 3년간 안정적으로 거래를 이어오다, 어느 날 갑자기 거래 대금 수천만 달러가 해외 중개은행에서 동결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해당 바이어가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의 제재 대상 목록(SDN List)에 신규 등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약서 어디에도 이런 상황을 대비한 조항은 없었습니다.
이 기업이 겪은 혼란은 결코 특수한 사례가 아닙니다. 미국, EU, 영국, 일본 등 주요국의 경제제재(Sanctions) 체제가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는 가운데, 국제거래 계약서의 Sanctions 조항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10년대 이후 국제 경제제재의 지형은 급격하게 변화했습니다. 과거에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한 포괄적 제재가 주를 이루었지만, 현재는 개인, 법인, 선박, 항공기 단위의 타겟형 제재가 보편화되었습니다. OFAC의 SDN 목록만 해도 등재 건수가 매년 수백 건씩 갱신됩니다.
문제는 이 제재의 영향력이 미국 영토 밖까지 미친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2차 제재(Secondary Sanctions)로 인해, 미국과 직접 관련이 없는 한국 기업이라 하더라도 미국 달러로 결제하거나, 미국계 은행을 경유하거나, 미국산 기술이 포함된 물품을 거래하면 제재 위반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실무에서 자주 접하는 위험 시나리오
계약 체결 시점에는 제재 대상이 아니었던 거래 상대방이, 계약 이행 도중 제재 목록에 등재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때 Sanctions 조항이 없으면, 계약 해제의 법적 근거가 모호해지고 이미 지급한 대금의 회수도 극히 어려워집니다.
EU 역시 2022년 이후 러시아 관련 제재 패키지를 십수 차례 발동하면서, 유럽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의 컴플라이언스 부담이 크게 늘었습니다. 한국 자체적으로도 대외무역법, 외국환거래법을 통한 제재 체계를 운용하고 있어, 다층적인 제재 리스크를 동시에 관리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상담 현장에서 보면, 국제거래 계약서에 "관련 법률을 준수한다"는 일반적 문구 한 줄만 넣고 안심하는 기업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포괄적 문구만으로는 실제 분쟁 상황에서 실질적 보호 기능을 하기 어렵습니다. 효과적인 Sanctions 조항이 갖추어야 할 핵심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계약서에 별도의 Sanctions 조항을 두지 않은 상태에서 거래 상대방이 제재 대상에 해당하게 될 경우, 법적으로 매우 복잡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우선, 제재 법규 자체가 강행법규이므로 제재 대상과의 거래를 계속하면 형사 처벌까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계약서상 해제 사유가 없으면, 거래를 중단하는 행위가 계약 위반으로 해석될 여지가 생깁니다. 상대방이 제3국 중재에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사례가 실제로 발생하고 있습니다.
금융기관 리스크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은행이 제재 스크리닝 과정에서 거래를 차단하면 대금 결제가 장기간 지연되거나 영구 동결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매도인은 물품을 이미 선적했으나 대금을 받지 못하고, 매수인은 대금을 지급했으나 물품을 수령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계약서에 이러한 상황에 대한 위험 배분 조항이 없으면 양 당사자 모두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됩니다.
또한 불가항력(Force Majeure) 조항으로 제재 상황을 처리하려는 시도도 있으나, 제재가 불가항력에 해당하는지는 해석상 논란이 큽니다. 국제상업회의소(ICC) 중재에서도 일관된 기준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Sanctions 상황에 대한 독립적인 조항을 별도로 마련하는 것이 훨씬 안전합니다.
글로벌 경제제재 환경은 당분간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미국은 2차 제재의 범위를 계속 확대하고 있고, EU는 제재 회피 방지를 위한 법적 장치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전략물자 수출통제와 금융제재 관련 법제를 지속적으로 보강하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한국 기업이 갖추어야 할 실무적 준비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기존 계약서 점검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국제거래 계약서에 Sanctions 조항이 포함되어 있는지, 포함되어 있다면 최신 제재 환경을 반영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3년 이상 된 계약서의 Sanctions 조항은 현행 법규와 괴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제재 스크리닝 프로세스 구축입니다. 거래 개시 전뿐만 아니라, 대금 결제 시점, 선적 시점 등 거래의 주요 단계마다 상대방과 관련 당사자의 제재 목록 등재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합니다. 무료 또는 유료 스크리닝 도구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셋째, 사내 컴플라이언스 체계 정비입니다. 법무팀, 무역팀, 재무팀 간의 협업 체계를 갖추고, 제재 관련 이슈 발생 시 신속하게 의사결정할 수 있는 내부 프로토콜을 마련해야 합니다. 특히 중소기업의 경우 별도의 컴플라이언스 인력을 두기 어려우므로, 외부 법률 전문가와의 협업 체계를 사전에 구축해 두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입니다.
국제거래의 법적 리스크는 계약서 한 조항의 유무에 따라 수억 원의 손해 차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Sanctions 조항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거래 규모와 상관없이, 국경을 넘는 모든 계약에서 제재 리스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오늘날 국제거래의 기본입니다.